불쾌한 밤
가던 길 잘 가다가 방향을 갑자기 바꾸는 사람을 보면 놀라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없이 자기 갈 길을 가는 것뿐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안심을 하고. 그 사람이 나와 아무 관계 없다는 확신은 그의 발자국 소리가 내 귀에서 멀어질 때서야 할 수 있다. 이런 습관이 생긴 건 고딩 때 겪은 변태 덕분이다.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잘 걷던 사람이 통화가 끝나자 방향을 바꿔 내게로 다가와 변태 행각을 벌였다. 당시 충격이 심했다. 분명 통화할 때는 정상인이었으니까. 또 대낮이기도 했고. 그후로는 갑작스레 걷는 방향을 바꾸는 남자에게 민감하다.
어제, 늦은 시간이지만 걸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기 아쉬웠다. 이 토요일 밤에 불러낼 동네 친구가 없다니 외롭다. 한 명 있는데 전화해보니 회사 야유회로 지방에 가있단다. 이런. 집 근처 동네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어떤 사람이 나와 반대방향으로 향해 걷다가 나를 보고는 방향을 바꿔 내가 가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앞서 썼듯 내가 그런 것에 민감하기에 발자국 소리를 향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와 상관이 없이 걷고 있는 거라면 어느 순간엔 발자국 소리가 나에게서 멀어져야 하는데 오랜 시간 나와의 거리가 일정하다. 원래 걷던 골목길로 들어서지 않고 계속 밝은 길을 걷다가 동네 지구대가 있는 쪽으로 갔다. 지구대를 지나 아직도 불이 켜져 환한 슈퍼마켓 앞에서 뒤를 돌아 집에 전화했다.
'엄마, 심상치 않아. 좀 와줘. 경찰서에 있을게.'
그 사람은 나를 쫓아오지 않은 척 내 옆을 지나 슈퍼마켓도 지나쳤다. 그 사람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기 갈 길을 갔어야 했는데, 뒤돌아서 확인하니 그가 나를 살피는 듯 서있었고, 나와 마주치자 엉뚱한 골목으로 방향을 갑자기 바꾸는 게 보였다. 나는 지구대 쪽으로 다시 되돌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또 내 뒤에 있었다. 이번에도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엉뚱한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경험상 그가 상대녀가 놀라는 표정을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가벼운 변태'라면 지나온 길이 비록 밝고 지나는 차량이 많았던 길가라고 해도 걸어오는 동안 주변에 걷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미 변태 행각을 보여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새벽에 오랜 시간 아무런 제스쳐 없이 무작정 나를 따라왔다면 이건 '작정했다'는 뜻 아닌가. 길 걷다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은 '성범죄'를 생각해뒀을 것이 분명하다. 어린 여자가 돈이 있어야 얼마나 있다고. 돈 많은 동네도 아니거니와. 나는 아예 지구대에 들어가 상황을 설명하고 어머니를 기다려 같이 집으로 갔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그 놈을 잡았더라도 엄한 사람한테 이런다 잡아때면 할 말이 없어 그 사람 누구냐는 경찰관의 말에 도망갔을 거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확실히 고딩 시절 순진한 변태를 반복적으로 상대한 효과가 있는가? 이런 식으로 어두운 밤, 집 앞까지 쫓아온 것도 모자라 바로 내 눈 앞으로 다가왔던 변태가 있었다. 나를 따라온 게 아닌 척하며 자꾸 엉뚱한 골목으로 들어가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밤, 화를 면할 수 있었다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이제 밤길을 혼자서는 절대 걷지 않기로 했다. 굉장히 불쾌하다. 좋아하는 밤길 산책도 못한다 생각하니 분하다. 역시 세상은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불쾌하다. 무섭기보다 짜증부터 인다.
mystyle wrote:
큰일날뻔 하셨군요 근처에 슈퍼나 경찰서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우리나라가 치안이 잘되어 있다지만 너무 늦은밤 여성 혼자 밤길은 피해야 할것 같아요.
전 반대 경우지만 밤길 앞에 여자분이 걸어가고 있으면 의도적으로 느리게 걸어서 간격을 많이 벌리거나 아니면 얼릉 걸어 앞질러 가버리지요. 여자분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치한 취급을 받지않기 위한 자기방어^^;;
¶ Posted May 21st, 2007 at 11:35
she wrote:
네 무서워요.. 계속 그렇게 방어해주세요.. ^^;;
¶ Posted May 23rd, 2007 at 12:41